Automatism2011. 1. 16. 23:04
그것은 거의 연극,
아버지 놀이에도 지친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꿉놀이
막이 내려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것도 연극
오이꽃이 웃는 것도 연극

고통은 밤하늘에 떠올라 울창한 숲을 이루고
그 아래 또 熱氣, 나는 풀잎 엉클어져
숨소리 거친 골짜기,
꽃 핀 나무들의 괴로움

그것은 거의 연극,
막이 내려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이성복, <남해금산> 중에서.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1. 11. 21:55

이곳에 와서 많이 즐거웠습니다 갖은 즐거움 다 겪었
습니다 민짜의 술집 여자들의 퉁퉁 부은 몸은 너무 즐거
워 오래 보기 괴로웠습니다 하얗게 면도한 돼지가 하늘을
향해 흥흥, 냄새 맡는 것도 보았습니다 얕은 냇물이나 냇
물가 조약돌보다  고운 아이들의 웃음도 보았습니다 그 웃
음 속에 꼬물거리는 구더기도 보았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신비로웠습니다

  이젠 내보내주세요, 가야겠습니다
  보내주세요, 풀어주세요, 소리치겠어요, 악쓰겠습니다
  내보내주세요!


- 이성복, <남해 금산>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0. 11. 10. 18:14
내 실업의 대낮에 시장 바닥을 어슬렁거리면,
그러나 아직, 나는 아직, 바닥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구나.
까마득하게 멀었구나.
나는 탄식한다.
아, 솔직이 말하겠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인다.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 보인다. 내 발 바로 아래에 놓인,
비닐 보자기 위에 널퍼덕하게 깔아 놓은,
저 냉이, 씀바귀, 쑥, 돌갓, 느릎나무 따위들이여,
그리고 그 옆의, 마찬가지로 널퍼덕하게 깔아 놓은,
저 멸치, 미역, 파래, 청강, 김가루, 노가리 등이여.
그리고 또 그 옆의, 마찬가지로 널퍼덕하게 깔아 놓고 앉아서,
스테인레스 칼로 홍합을 까고 있는,
혹은 바지락 하나하나를 까고 있는,
혹은 내 발 아래에 있는, 짓뭉개져 있는,
저 머나먼, 추운 바닥이여.
나의 어머님이시여.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0. 10. 29. 21:48
1.
어둔 골짜기 깊은 곳에 굶주린 자들이 죽어 갑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빵을 내보여 주시지만, 죽게 내버려 둡니다.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영원한 옥좌에 앉아 주위를
환히 비추고 계시지만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는 몸서리가 쳐집니다.

2.
젊은이,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자들은 죽게 내버려 두셨지만
죽으려는 자들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썩어 문드러진 많은 사람들은
당신을 믿고 확신하며 죽어 갔습니다.

3.
가난한 자들의 동경이 당신이 살고 계신 천상보다 아름답기에
많은 세월 그들을 가난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당신이 빛으로 오시기 전에 그들이 죽었다니 유감입니다.
그들은 축복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곧 썩어 버렸습니다.

4.
당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허나 어찌 그런 거짓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당신 때문에 살아가고 또 죽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지 말해 주십시오!
Posted by rabbit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