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omatism2011. 8. 20. 01:30
<검은 담즙> 
                               조용미

가슴속에서 검은 담즙이 분비되는 때가 있다 이때 몸속에는 꼬불
꼬불 가늘고 긴 여러 갈래의 물길이 생겨난다 나뭇잎의 잎맥 같은
그 길들이 모여 검은 내, 黑河를 이루었다

흑하의 물줄기는 벼랑에서 모여 폭포가 되어 가슴 깊은 곳을 가르며
옥양목 위에 떨어지는 먹물처럼 낙하한다

폭포는 검은 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 생의 단 한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비애는 그을린 태양 아래 거칠고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누워있다

쓸갯물이 모여 생을 가르는 劍이 되기도 하다니 검은 폭포 아래에서
모든 것들은 부수어져 거품이 되어버린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니 幻이 끝나고 滅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을 검은 담즙이 모여 떨어지는
흑하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지상에서 가장 헛된 것이라 부르겠다

지상에서 가장 헛된, 그 아름다움의 이름은 絶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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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늘에서야 내 죄가 무엇인지를 알겠구나. 후훗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8. 6. 01:08
느낌

           -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 있다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6. 13. 00:58
기형도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를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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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일상적 행복과 절연된 채, 구름처럼, 혹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나이든 사내의
지친 모습을 냉정하게, 사진 설명하듯 묘사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그로테스크하다.
그 시선은 이 세계는 빈집이며, 사람은 그 빈집의 창에 머무르는 구름 같은 것이며
나는 내 속의 추억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들레르적 인식에 침윤되어 있다.

김현 <행복한 글쓰기, 147>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5. 27. 16:09
<고등어 울음소리를 듣다> _ 김경주

깊은 곳에서 자란 살들은 차다

고등어를 굽다 보면 제일 먼저 고등어의 입이 벌어진다 아....하고 벌어진다 주룩주룩 입에서 검은
허구들이 흘러나온다 찬 총알 하나가 불 속에서 울고 있듯이 몸 안의 해저를 천천히 쏟아낸다
등뼈가 불을 부풀리다가 녹아내린다

토막을 썰어놓고 둘러앉아 보라색들이 밥을 먹는다
뼈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 후 입 안의 비린내를 품고 잠든다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보라색 입을 쩝쩝거린다

어머니 지느러미로 바닥을 치며 등뼈를 세우고 있다 침 좀 그만 흘리세요 어머니 얘야 널 생각하면
눈을 제대로 못감겠구나 옆구리가 벌어지면서 보라색 욕창이 흘러나온다 어머니 더 이상 혀가
가라앉았다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 몸에 물을 뿌려주며 혀가 가슴으로 헤엄쳐가는 언어 하나를
찾았다 생이 꼬리를 보여줄 때 나는 몸을 잘랐다

심해 속에 가라앉아 어머니 조용히 보라색 공기를 뱉고 있다 고등어가 울고 있다

p.s. 날씨는 더운데 그래서 몸에서 열기가 나는데 마음은 차갑다. 늘...
김경주 시인의 여행집 <패스포트>를 읽어보고 싶어지는 날. 정말 떠나리라. 떠나고 말리라.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3. 6. 19:43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흰 똥을 갈기고
죽어 삼일간을 떠돌던 한 여자의 시체가
해양 경비대 경비정에 걸렸다.
여자의 자궁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었다.
(오염된 바다)
열려진 자궁으로부터 병약하고 창백한 아이들이
바다의 햇빛이 눈이 부셔 비틀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파도의 포말을 타고
오대주 육대양으로 흩어져 갔다.
죽은 여자는 흐물흐물한 빈 껍데기로 남아
비닐처럼 떠돌고 있었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릿츠버그나 오덴달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오염된 바다)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3. 4. 01:04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3. 2. 20:12
그녀는 구두를 사려고 자기 넋을 팔았어
하지만 만약 내가 그 더러운 여자 곁에서
위선을 떨고 고상한 척하면
하느님이 웃을 테지
내 사상을 팔며 작가가 되려는 내가 말일세


너는 온 세상을 네 규방 안에 끌어넣겠구나
(...)
숨은 뜻을 가진 위대한 자연이
(...)
천한 짐승, 너를 가지고 하나의 천재를 반죽해 낼 때
아무리 악에 능숙한 너일지라도
그 엄청난 악에 질겁하여 뒷걸음질친 일은 없었던가?
오 추악한 위대함1 숭고항 치욕이여!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2. 28. 21:50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 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 간다.
믿을 수 없이, 기적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덤프 트럭이 들어와
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과 똥을
쿵 하고 부려놓고 가고

내 주여 네 때가 가까왔나이다
이 말도 나는 발음하지 못하고
다만 오물로 가득찬 내 아가리만
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
허공에 동동 떠 있다.

p.s. 어흐 좋아~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2. 26. 14:04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p.s.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 최승자
Posted by rabbityoo
Automatism2011. 2. 26. 09:40
이 세상에 시계처럼 고단한 것은 없다
인간들 또한 그러하다
아침이오, 저녁이오,
또각또각 참으로 고단하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것들의 하늘
잃어버린 것들의 신화

다시 그리하여 잃어버린 것들의 밤

그래도 오늘은 맑은 소프라노의 하느님이
아침 노래를 하고 있다

p.s. 최승자 시인의 글은 읽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Posted by rabbityoo